비극의 발단 - 1972년 1월 31일. 북아일랜드 데리 시의 주민들은 영국정부의 불법억류에 반대하고 시민권을 주장하기 위해 평화적인 행진을 벌이기로 한다. 데리시민권협의회 대표이자 영국의회 하원의원인 아이반 쿠퍼는 IRA의 무력적인 저항방식에 반대하며 평화행진을 주도한다. 그는 비폭력적인 시위만이 그동안의 차별과 억압에서 벗어나 정당한 권리를 되찾을 유일한 방법임을 역설하면서 시민들이 행진에 참가하도록 설득한다. 그러나 행진이 시작되기도 전에, 도시는 불안한 조짐을 보이며 술렁인다.
도시를 봉쇄한 군대와 시민행렬의 대치 - 북아일랜드 지역에서 벌어지는 모든 집회를 불법행위로 규정해온 영국정부는 이번 행진도 잠재적인 폭력사태로 간주, 폭도진압을 위해 공수부대를 포함한 대규모의 군대를 배치하여 데리 시를 봉쇄해버린다. 진압군 총사령관 포드 장군은 처음부터 평화시위 자체를 부정하며 시위 중 당연히 발생할 것으로 확신하는 무력행위에 병사들이 즉각 반격하도록 지시한다.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폭발해버릴 듯한 초 긴장 상태에서, 아이반은 충돌을 막기 위해 계획했던 행진루트를 변경하는 등 동분서주하는데... 행진에 참가한 일부 청년들이 대열에서 이탈하여 돌을 던지며 흥분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상황은 통제불가능한 사태로 발전하는데.
공수부대의 과잉진압과 무고한 시민의 희생 - 영국군은 청년들이 과격해진다는 것을 빌미로 공수부대까지 투입하며 진압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대대간의 연락이 엉키고 명령은 전달될수록 왜곡되어 고무탄과 가스수류탄은 곧 진짜 총알로 대체된다. 결국 공수부대의 무차별 총격으로 노인과 부녀자를 포함해 13명이 숨지고 14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벌어진다. 고요하고 평화롭던 도시 데리는 순식간에 피로 물들고 유족들의 눈물바다로 변한다.
그날 이후, 남은 이야기 -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이 참사는 영국정부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 은폐된다. 맨손으로 행진에 참가했던 17세의 청년 제리가 공수부대의 총에 목숨을 잃은 후 폭탄테러범으로 위장되는가 하면, 사건 이틀 후에 영국정부의 주관으로 열린 청문회에서 재판장은 영국군 주장을 받아들여 병사들이 IRA의 선제공격에 반격한 것으로 결론짓는다. 다만 희생자들의 무장여부와 작전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강한 의구심"을 표명한다. 과잉진압의 책임이 있는 공수부대원들은 상황을 조작하여 처벌을 면하고, 작전명령을 내렸던 장교들에게 영국여왕은 훈장을 수여한다.
{피의 일요일 2일 뒤, 영국 정부는 위저리 대법원장의 지휘로 위원회를 열었다. 위저리 판사는 병사들이 복사이드에 들어섰을 때 공화국군의 공격을 받았다는 영국 군대의 주장을 받아드렸다. 그는 희생자들이 총기를 사용했다는 '유력한 혐의'가 있으며, 영국군의 행동은 정당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발포에 가담한 군인은 단 한명도 처벌받지 않았으며, 작전 지휘관은 후에 여왕에게 훈장을 받았다.}